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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 다룬 tvN '철인왕후'… 철종의 가계도
안녕하세요? Moobee 입니습니다. 오늘은 ‘조선 철종 다룬 tvN '철인왕후'… 철종의 가계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철인왕후'가 조선 철종을 다룬 가운데 극중 등장인물과 원작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요. 지난 12일 첫 방송된 tvN 새 토일드라마 '철인왕후'(연출 윤성식, 극본 박계옥‧최아일)는 불의의 사고로 대한민국 대표 허세남 장봉환(최진혁 분)의 영혼이 깃들어 '저 세상 텐션'을 갖게 된 중전 김소용(신혜선 분)과 두 얼굴의 임금 철종(김정현 분)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혼가출 스캔들을 그립니다. 중국의 웹 드라마 '태자비승직기'이 원작입니다.
첫 방송에서 수도권 기준 평균 8.7% 최고 11.0%, 전국 기준 평균 8.0% 최고 9.9%로 케이블, 종편을 포함한 동시간대 1위를 차지한 '철인왕후'는 2회에서도 수도권 기준 평균 9.5% 최고 10.9%, 전국 기준 평균 8.8% 최고 9.9%로 케이블과 종편을 포함한 동시간대 1위를 지켰습니다. (케이블, IPTV, 위성을 통합한 유료플랫폼 기준 / 닐슨코리아 제공)
현대의 문제적 영혼이 금기 속에 살아가는 중전의 몸에 불시착해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궁궐 생존기, 비밀 많은 철종의 이야기는 '철인왕후'의 한 축을 이루는 주요 에피소드인데요.
특히 철종은 조선의 실제 임금으로, 실존 인물에 가상의 스토리를 더한만큼 시청자들의 궁금증도 더욱 배가되고 있습니다. 철종은 겉보기에는 허술하고 만만한 허수아비 왕이지만, 누구보다 날카롭고 단단한 내면을 지닌 인물. 허허실실 가면을 쓰고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예리하게 주시하는 그의 곁에는 같은 꿈을 꾸는 두 남자가 있습니다.
철종의 강화도 시절 친구 홍별감(이재원 분)과 철종의 이복형이자 금위대장인 영평군(유민규 분)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이들은 철종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인물로, 수많은 등장인물 중 가장 큰 활약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읍니다.
또 2회 만에 드러난 또 다른 두 얼굴의 소유자 조화진(설인아 분)와 김소용의 대립 역시 기대 포인트인데요. 여기에 순원왕후(배종옥 분), 김좌근(김태우 분)를 비롯한 안동 김씨 가문이 김소용과 이뤄낼 활약에도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물론 학교 다니실 때 다 배우셨겠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할 수도 있죠? 그래서 철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왕위에 오른 강화도령>
철종은 1831년(순조 31)에 전계대원군의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전계대원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서자인데요. 전계군의 일가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와 사면을 반복했습니다. 전계군의 이복형인 상계군(常溪君)은 정조 때 홍국영의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에 유배된 후 죽었고, 아버지 은언군은 신유박해(순조 1) 당시에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상계군의 부인)와 함께 사사되었습니다.
전계군 본인도 큰아들 회평군(懷平君)이 역모에 연루되어 옥사하는 바람에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전계군은 세 명의 부인으로부터 각각 아들 한 명씩을 낳았으며,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셋째 아들이 철종인데요. 이름은 변(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입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습니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종사의 부탁이 시급한데 영묘조(英廟朝)의 핏줄은 금상(今上)과 강화에 사는 이원범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광(㼅)의 셋째 아들이다." - 《헌종실록》 권 16, 헌종 15년 6월 6일”
당시 이원범은 학문과는 거리가 멀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채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인데요. 철종은 헌종이 죽은 지 이틀 만인 6월 8일에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그다음 날 창덕궁에서 즉위했습니다. 당시 철종의 나이 19세였지만 친정을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순원왕후가 처음부터 철종을 왕위 계승자로 점찍은 것은 아니었는데요. 원래는 덕흥대원군의 종손인 이하전(李夏銓)으로 후사를 이을 생각이었습니다. 항렬상 이하전은 헌종의 조카뻘이었는데요. 그러나 이하전 주위에 벽파 세력이 많은 것을 염려한 안동 김씨 세력이 순원왕후를 설득해 후계자를 바꾸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만한 왕을 앉혀 놓고 풍양 조씨에게 빼앗겼던 권력을 되찾으려고 했는데요. 철종은 학식도 덕망도 부족한 왕이었습니다. 덕분에 궁정은 안동 김씨의 손에 좌지우지되었습니다.
철종은 1851년(철종 2)에 순원왕후의 친척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그가 철인왕후(哲仁王后)다. 이로써 안동 김씨는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며 세도정치를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철종에게는 이 밖에 7명의 후궁이 있었는데요. 철인왕후와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은 모두 일찍 죽었습니다. 궁인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가 철종의 유일한 혈육이었습니다.
<절정에 달한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확산>
철종은 1852년(철종 3)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독자적인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안동 김씨 세력의 눈치를 보면서 크고 작은 정사를 모두 그들의 뜻에 따라 처리했는데요. 일설에 의하면 철종이 점차 학식을 쌓고 정치적인 역량을 키우려고 하자 안동 김씨 세력이 일부러 철종에게 후궁을 계속 들여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철종은 주색에 빠진 채 점점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었고, 안동 김씨 세력의 학정은 더욱 극에 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요.
이런 가운데 더욱 문란해진 삼정과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거기에 자연재해로 인해 농사까지 망치게 되면서 백성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요. 철종과 안동 김씨 세력은 선혜청을 통해 기근이 심한 지방에 돈을 풀어 구제를 시도하고 탐관오리들에 대한 징계를 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1862년(철종 13), 마침내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전국적인 규모의 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민란은 2월 18일에 일어난 진주민란이었는데요.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경상도 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탐학이었습니다. 백낙신은 부임하자마자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농민들을 수탈했습니다.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백성들에게 그가 수탈해 간 액수는 약 4~5만 냥에 이르렀는데요. 여기에 진주목에서 그동안 관리들이 불법으로 횡령한 세금을 일시에 거둬들이려고 하자 관리들은 이것을 또다시 농가에 부담시키려고 했습니다. 이에 농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는데요. 몰락한 양반인 유계춘(柳繼春) 등이 중심이 되어 거사를 도모하고 한글 격문을 내붙여 민란에 가담할 농민들을 모았습니다. 이들 봉기군은 스스로를 초군(樵軍)이라고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고 향리들을 잡아다 죽였는데요. 또한 부호를 공격해 재물을 약탈하기도 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조정에서는 박규수(朴珪壽)를 진주안핵사로 파견해 민란을 조기에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주민란은 3개월이 지난 후에나 겨우 진정되었습니다. 한편 진주민란으로 충격을 받은 철종은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토로했습니다.
“내가 이번 진주의 일에 대해 실로 개연(慨然)하고도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대령(大嶺) 이남은 옛날에 이른바 추로(鄒魯)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군현(群賢)들이 배출되었고, 풍속도 순후(淳厚)해 비록 집집마다 봉(封)할 만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탄식과 원망과 수심이 깊어 백성들이 잘 살아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지금의 이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본심(本心)으로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첫째는 내가 부덕(否德)한 탓으로 도솔(導率)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지 못한 것이고, 둘째로는 백성을 다스리고 적을 막는 신하가 조가(朝家)에서 백성을 어린아이 보살피듯 하는 뜻을 잘 대양(對揚)하지 못한 탓이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얼굴이 붉어져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 《철종실록》 권 14, 철종 13년 3월 10일”
그리고 이 사태를 수습하면서 억울하게 벌을 받는 백성이 없도록 할 것을 특별히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철종의 이러한 마음도 성난 민심을 달래지 못했고, 민란은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계속 번져나갔습니다.
한편 조정에서는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 41개조를 제정해 반포했는데요. 나름의 개혁 정책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시변통에 불과한 이 정책으로는 썩을 대로 썩은 삼정의 폐단을 시정할 수 없었습니다.
<철종의 가계도>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다>
철종에게는 부인이 8명이나 있었지만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안동 김씨 세력은 자신들의 세도를 조금이라도 위협할 만한 종실은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한때 헌종의 후사로 거론되었던 이하전을 끝내 역모로 몰아 사사한 것에서도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이하전은 평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인가? 아니면 김씨의 나라인가?"라고 하며 안동 김씨 세력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그것이 그의 명을 재촉했습니다.
이렇듯 500년을 이어 온 이씨 왕실의 씨가 말라 가는 가운데 철종은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갑자기 왕위에 올라 결국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지도 못하고 후사도 잇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 버린 것인데요. 이미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니 조선의 국운도 그렇게 서서히 기울어 갔습니다. 철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예릉(睿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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